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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승용차·벤치 밀담…정상회담 관전 포인트

- 글 : 문관현 연합뉴스 통일외교부 부장대우

정책브리핑 |2018.5.4


분단 55년 만에 남북한 정상이 처음 만난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 풍경은 드라마 그 자체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순안공항까지 직접 나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맞이했고, 숙소인 백화원초대소로 향하는 캐딜락 승용차에 동승하는 파격 행보를 보였다. 김 전 대통령이 승용차 상석인 뒤편 오른쪽 자리에 오르자 김 위원장은 예고 없이 왼쪽 문을 열고 김 전 대통령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로 인해 이희호 여사는 별도의 차량을 이용했지만, 나란히 앉은 남북 정상은 50분 동안 ‘차내 밀담’을 통해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 승용차에서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회담 테이블로 이어졌고, 역사적인 6·15 공동선언을 탄생시켰다.

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은 남북 정상의 깜짝 동승에 대해 “흥미 위주로 보면 끝이 없지만 가벼운 인사 뒤 평양 시내를 소개한 정도로 알고 있다”고 말을 아꼈지만, 베일에 가려진 대화 내용에 대한 의혹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미군 첩보위성의 도청을 따돌리기 위해 두 정상이 한 차량에 동승했다거나 승용차 안에서 ‘연방통일안’에 합의했다는 주장을 내놓은 바 있다.

18년이 지나 판문점에서 개최된 남북정상회담에서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도보 다리(Foot Bridge) 벤치에서 배석자 없이 30분 동안 사실상 단독정상회담을 한 것이다.

도보 다리는 1953년 중립국 감독위원회가 판문점을 출입하면서 멀리 돌아가는 불편을 줄이기 위해 설치했다. 두 정상이 파란색 도보 다리 위에서 분단의 상징인 군사분계선(MDL) 표식물을 만져보면서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연출했다. 이날 대화 장면은 전 세계로 생중계됐다. 문 대통령이 대화를 주도하는 가운데 김 위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경청하는 분위기였으나 대화 내용 역시 공개되지 않고 있다.

도보다리 친교 산책 후 끝 지점에 단둘이 앉아 대화를 나누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이처럼 남북한 정상들이 회담 테이블에 마주 앉기 전에 나눴던 밀담내용은 확인되지 않지만 원만한 행사진행에 윤활유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긴장감을 풀어주는 가벼운 덕담부터 핵심의제에 대한 의중을 담은 뼈있는 발언까지 오고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익명을 요구한 대북 전문가는 “정상 간 대화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기록을 남겨야 하지만 성공적인 회담 개최를 위해 속내를 털어놓기도 한다”면서 “공개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밀담접촉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필자는 군복무 시절인 1991년 여름 수색정찰을 위해 판문점 주변 갈대밭에 처음 들어서던 순간의 긴장감을 잊을 수 없다. 판문점은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와 개성직할시 판문군 판문리라는 2개의 행정구역 주소로 존재한다. 남북 정상이 이야기꽃을 피운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가면 백학산(해발 229m)과 2개의 저수지가 나온다. 냉전 시절 북한군은 저수지 주변에 조성된 갈대밭을 따라 침투조를 보내 판문점 후방에서 용납 못할 만행을 저질렀다. 보다 못한 유엔군사령부는 해당 지역을 ‘침투의 계곡(Infiltration Valley)’이라 부르고 무장병력을 매복시켜 수시로 무력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개성공단 취재를 위해 노트북 가방을 메고 군사분계선을 넘어갈 때 사천강 건너 대성동 마을을 돌아보았다. 내가 서 있는 곳에 주둔했던 북한군 240mm 방사포 부대가 15km 북측 후방으로 물러서고 120여 개 남한 기업들이 입주해 생산활동을 벌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제 남북은 판문점 선언을 계기로 칼과 창을 녹여 보습과 낫을 만드는 평화의 시대, 그 역사의 출발점에 섰다.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한 판문점 인근이 남북경협의 상징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남북한 군 통수권자들이 여유롭게 벤치에 앉아 항구적 평화체제를 논의하는 마당이 됐다. 그야말로 한반도 봄이 찾아온 것이다.

북한은 과거에 사실상 미군이 관리하는 판문점에서 남북 간 화해와 협력을 논의하는데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거부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이번 정상회담을 앞두고 우리 측으로부터 평양과 서울, 판문점 등 후보지를 제안받고 이 가운데 선뜻 판문점을 선택했다는 점도 놀라운 사실이다. 북미 정상회담 개최지로도 거론되는 판문점이 반세기 만에 분단의 상징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폭 50cm 콘크리트 장벽 사이로 첫 악수를 나눈 남북한 정상은 12시간의 끈끈한 만남을 통해 “세상에서 둘도 없는 좋은 길동무”가 됐다. 판문점 도보 다리를 함께 산책한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손을 잡고 백두산과 개마고원을 트레킹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그때는 길동무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갈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